연재/마더래디쉬

[리막] 공허

한율 픽 2017. 4. 30. 18:35
 네가 없는 세상에 내가 존재할 이유는 없었다.



 혜진은 오늘도 멍하니 열린 창밖을 보기만 했다. 낮임에도 어두운 방 안 한 구석에 걸린 벽시계의 시곗바늘만 거슬리는 기계소리를 내며 바삐 움직였다. 창문에 점점이 떨어지며 톡톡 소리 내는 물방울들을 보며 아, 비가 오는구나. 하고 생각할 뿐 방 안을 젖게 만드는 창문을 닫을 생각은 없었다. 거세진 빗줄기가 창틀에 부딪혀 혜진의 얼굴에 차가운 저의 온도를 자랑하고서야 혜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문을 닫았다. 쏴아아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내려다보며 혜진은 문득 저 비를 흠뻑 맞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허무맹랑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충 검은색 트레이닝 복을 위아래 걸쳐 입고 슬리퍼에 대충 발을 끼운 뒤 문을 열었다. 등 뒤로 닫힌 문에서 띠리릭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생각은 느렸지만 걸음은 느리지 않았다. 몇 발자국을 걷고 계단을 내려갔을까, 빗줄기 안으로 들어왔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온몸이 흠뻑 젖은 이후였다. 저를 거슬리게 했던 차가운 빗방울은 눅눅하게 더운 공기에 지친 몸에 생각보다 괜찮은 위로가 되었다. 웅덩이에 고인 물을 찰박찰박 소리 나게 걷어차 내 보기도 하고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의 흐름을 구경하기도 했다. 큰 우산을 쓰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혜진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가끔 쳐다보았지만 혜진은 개의치 않았다.

 "혜진아,"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지만 혜진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혜진아 그러다 감기 걸려. 얼른 집에 들어가서 샤워하자."
 그 언젠가의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발바닥이 시린 강아지 마냥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혜진을 우산 아래서 웃으며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용선은 생글거리는 표정에도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혜진을 우산 아래로 이끌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살살 털어주고는 시무룩한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추고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슬슬 바들거리기 시작하는 혜진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같이 씻어."
 씻고 나와서 마실 차를 타겠다며 주방으로 가려는 용선의 옷자락 끝을 붙잡은 혜진이 한껏 붉어진 얼굴로 나직하게 말을 꺼내자 용선이 배시시 웃었다. 조금 따뜻해진 혜진의 볼에 손을 대고 가볍게 입을 맞추며 용선이 겉옷을 벗고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물에 몸도 녹이고 조금 야릇한 행위도 해버린 둘은 알맞게 맞춰둔 보일러 온도에 노곤해졌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 두꺼운 이불 아래로 몸을 밀어 넣은 둘은 가볍게 쪽쪽 입을 맞추고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 뒤 눈을 감았다.


 얼마나 오래 서있었는지 온몸을 달달 떨며 집으로 돌아온 혜진은 젖은 옷을 대충 내팽개치고 미처 끄지 않고 나갔던 보일러에 감사하며 따뜻한 물을 맞았다. 떨림이 서서히 가시고 물이 가득한 욕조에 앉아 넘치는 물을 바라보았다. 용선과 함께 들어갔던 때에는 훨씬 더 많이 흘러버렸었는데,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던 용선에게로 닿아버린 기억은 또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 따뜻한 물 속에서도 느껴지는 시린 기운에 혜진은 저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흐릿하게 웃으며 저를 보고 있는 용선에게로 가 닿았다. 걷잡을 수 없이 저를 덮쳐오는 용선과의 기억에 혜진은 숨이 막혔다. 하지만 숨을 쉬려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점점 고통스러워지는 숨에 몸이 본능적으로 공기를 찾았다. 처음으로 저에게 버럭 화를 내던 용선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욕조에서 일어나 대충 물기를 닦고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둘둘 싸맸다.
 "언니."
 "용선언니, 김용선."
 들숨 하나에 용선을 한번, 영영 답이 돌아오지 않을 이름을 부르다 혜진은 눈을 감았다.
 "내가 언니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덤덤하게 중얼거린 혜진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